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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연자(77·가명) 씨는 요즘도 베틀에 서 있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지지리 가난했던 시절, 대구 직물공장에만 취업하면 먹여주고 기술까지 알려준다는 말에 곽 씨는 1961년 경남 고성군을 떠나 대구에 왔다. 열 여덟 나이에 매일 16시간씩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자식들에게만큼은 더 나은 미래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둘째 딸 이제연(51·가명) 씨는 곽 씨의 평생 아픈 손가락이다. 이 씨가 20년 넘게 조현병을 앓으면서 모녀의 형편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랜 기간 딸 뒷바라지를 한 노모에겐 이제 기력조차 없다.

◆ 조현병 앓는 딸
곽 씨의 딸, 이 씨는 지난해 9월 극단적인 자해 시도를 했다. 자다 말고 딸의 앓는 소리를 들은 곽 씨는 선혈이 낭자한 방바닥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새벽녘 노모 곽 씨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온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119를 부를 수 있었다.


1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후 몇 년간 치료를 하면서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었는데 사달이 난 것이었다. 딸이 조현병 약을 제때 먹지 않았던 것이었다. 곽 씨는 서랍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딸의 약봉지를 보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약을 먹기 싫어하는 딸을 수차례 타일렀지만, 이렇게까지 몰래 약을 숨겨놓고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 씨는 그날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 결과는 좋지 못했다. 복막 감염으로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 있다.
딸 이 씨는 2003년에 조현병으로 중증장애인 진단을 받았다. 1995년 결혼했지만 6년만에 이혼했다. 대인관계와 사회생활 모두 어려웠던 이 씨는 밖에 나가면 몇 시간이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유일한 취미다. 평소 얌전한 성격에 밖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가혹하리 만큼 심한 공격성을 보이곤 했다. 곽 씨는 "딸이 학창시절에는 내성적인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며 "같이 살게되면서부터 알아듣기 어려운 혼잣말을 자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자식 생각하면 눈도 편하게 못 감겠어
곽 씨의 남편은 결혼 13년 만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줄줄이 딸린 네 남매 입에 풀칠은 해야 했다. 일 나가기 전 매번 아이를 맡긴다고 동네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엄마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고서도 이 말을 놓지 못하고 있다.
딸이 처음 자해를 했을 때 경찰은 곽 씨를 의심해 몇 주간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부 이웃의 빈정거림에도 곽 씨는 연방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 뒤돌아 눈물을 감추기 일쑤였다.


감정적인 것은 스스로가 떨쳐낼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생활고는 평생을 붙어다니는 골칫거리다. 셋째 딸과 막내아들은 몇 년째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큰 딸(54)과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지만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에 서로 한숨만 주고 받는다.


수개월째 병원에 있는 딸 앞으로 이미 자부담 병원비만 600만 원이 넘는 상황이다. 지금도 간병비로만 매일 11만원이 든다. 기초생활수급금과 노령연금 등을 합쳐도 월 생활비는 9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곽 씨는 세상 사람들에게 내 딸이 미친 것이 아니라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앓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딸이 스스로 원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며 "마음의 병을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옆에서 돌봐줘야 하는데… 딸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눈을 남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주형 기자 coo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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