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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살 난 첫째 아들을 내버려두고 온 한국 땅. 몽골에서 온 박트(38) 씨 부부는 아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버텨야 했다. 말도 안통하는 낯선 땅에서 의지하고 정 붙일 상대는 서로뿐. 이들은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가던 중 둘째 딸 궁주(2)를 얻었다.


궁주는 걸음을 막 뗄 쯤에 벽에 자주 부딪쳤다. 걷다가, 혹은 뛰다가 마주하는 벽과 난간을 모조리 박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계단을 오를 땐 한참을 다리로 더듬거리다 발을 내디뎠다. 엄마 나라(34) 씨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겠거니, 생각했다. 큰 패착이었다. 궁주는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세상에 나온 지 2년도 채 안된 소중한 딸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부모는 억장이 무너져내린다.

◆ 아이 건강마저 못 돌보게 만든 생활고
궁주의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은 생후 100일쯤 됐을 때다. 오른쪽 눈 동공에 흰 반점이 생겼던 것. 부부는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상태는 점점 악화했다. 결국 지난 3월 눈이 충혈되고 크게 부풀어올라서야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망막모세포종 3기라는 얘기를 듣고 나라씨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망막모세포종은 시신경세포가 악성 종양으로 제 기능을 못하는 병. 궁주의 오른쪽 눈은 이미 시력을 잃어버렸을 만큼 심한 상태였다.


서툰 한국어 탓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몽골에 있는 친척들이 '어릴 때는 그럴 수 있다'며 위로해준 말이 다시 생각났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애써 안심한 스스로가 아직도 밉다.


얼른 항암치료를 하지 않으면 왼쪽 눈으로 전이될 수 있어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병원의 문턱은 너무나 높았다. 돈에 대한 부담감은 아이의 건강 상태에 눈을 감게 했다.


일용직 노동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터라 궁주의 분윳값, 기저귀값을 대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라 씨는 "한쪽 눈이 실명이 된 상태였는데도 병원을 못 데려간 게 평생 한이다. 자식을 지키지 못한 내가 과연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 일용직 노동자 아빠, 다리마저 다쳐
그저 착실하게,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다. 남편을 몽골에 두고 2015년 한국에 먼저 건너온 나라 씨는 김치 공장과 모텔방 청소 등을 전전했다. 모텔 창고에서 숙식을, 욕실 청소를 하며 눈치껏 씻기를 해결했다. 한국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악덕 사장에 돈을 떼인 적도 수두룩했다.


2년 뒤 남편이 한국에 들어왔지만, 육체 노동은 끝없이 이어졌다. 부부는 꼬박 3년 동안 농장에서는 40kg의 양파 자루를, 건설 현장에서는 50kg의 철근을 수없이 옮겼다.


몽골에 남겨진 아들과 부모님, 2명의 조카를 위해 힘들어도 꾹 참고 견뎌왔건만, 불행만 더해주는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가장인 박트 씨는 얼마 전 일터에서 다리를 크게 다쳤다.


소가죽 공장에서 가죽을 씻는 소금 자루를 옮기던 박트 씨 위로 비스듬히 쌓여있던 소금 자루들이 쏟아져 내렸다. 1t이 넘는 무게였다. 몸을 피했지만 소금자루 더미에 다리가 묻혔다. 오른쪽 무릎 관절이 손상되면서 한동안 일을 쉬어야 했다. 당장 나라 씨라도 생활비를 벌어 보려 했지만, 아픈 궁주가 엄마를 계속 찾아 어디에 나갈 수도 없다.


박트 씨는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다시 일터에 나선다. 궁주의 밀린 수술비 860여 만원, 6개월에 1천만 원이 훌쩍 넘는 항암치료비가 당장 목을 조르기에 더 이상 일을 쉴 수 없다. 이를 꽉 깨물고 한 포대에 200kg이 넘는 소금 자루를 다시 쥔다. 그의 월 수입은 180만원이 전부. 이 상태로라면 궁주는 앞으로 세상을 아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푹 숙인 박트 씨는 "궁주에게 새 옷 한 벌도 사준 적이 없는데 나머지 한쪽 눈마저 잃게 할 수 없다. 한시가 급한데 다리는 눈치도 없이 자꾸 아프다"며 다리를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배주현 기자 pearz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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