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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항암치료를 끝내고 쓰러지듯 누운 병실 침대.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려 장정선(가명·47) 씨는 눈을 꼭 감는다. 이내 곧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캐나다에 있는 딸 이재영(가명·13) 양이다. 벨소리는 한참을 울리지만 정선 씨는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항암치료로 진이 빠질대로 빠져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탓에 차마 딸과 통화를 할 수 없다. 멀리서 공부하고 있는 딸이 걱정할까 암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숨기고 있던 터였다. 사실 딸의 전화를 받지 않은 지는 꽤 됐다. 가족이라곤 딸 하나뿐인 정선 씨. 그녀는 딸이 너무 보고 싶다.


◆ 가족 갖고 싶어 온 한국, 폭력 남편에 상처만 가득

정선 씨는 지난 2006년 중국 길림성에서 한국으로 시집왔다. 가족이 갖고 싶어서였다. 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어 피부 마사지사를 하며 홀로 살아온 터였다. 결혼중개업체가 보여준 사진 속 말끔한 정장 차림의 예비 남편.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 하나로 한국행을 택했다.


경북의 한 시골 마을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하는 남편의 성실한 모습에 정선 씨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보일러 공장에 취직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이듬해엔 딸도 생겼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의 온기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들이었다.


남편의 본색이 드러난 건 딸을 임신한 직후였다. 회사에 나가는 모습은 얼마 가지 않아 술을 마시러 다니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매일 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임신한 정선 씨 몸에 손찌검을 해댔다. 여태껏 보인 남편의 모습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모습 역시 결혼을 위한 연기였다.


정선 씨는 10년간 폭력에 시달리며 딸과 보호센터로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어김없이 남편을 피해 보호센터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온 한 날. 문을 열고 들어선 집엔 낯선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남편이 집을 본인에게 팔았다고" 했다. 그해 남편은 외도까지 저질러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터였다. 정선 씨는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어 길고 긴 소송 끝에 남편과 갈라섰다.


◆ 하나뿐인 딸은 캐나다로, 한국에 홀로 남았지만 암 걸려

딸아이와 낯선 도시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한 모녀. 정선 씨는 식당, 미화원을 전전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계속되는 일로 매일 잠든 딸을 집에 홀로 두고 나와야 했다. '밥 챙겨 먹어라', '학교 가라' 엄마는 늘 전화로 아이를 챙길 수밖에 없었다. 늦게 돌아온 집에선 아이가 먹었던 밥을 치우다 정선 씨는 매번 눈물을 훔쳤다. 쉰내가 나는 성치 않은 밥. 이걸 홀로 먹으며 엄마를 기다린 딸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차츰차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던 모녀에게 2년 전 행운이 찾아왔다. 평소 다니던 불교 단체의 전액 지원으로 딸이 캐나다로 연수를 갈 수 있게 됐다. 일만 하던 탓에 딸의 교육에 도통 신경 쓸 수 없던 정선 씨는 늘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렇게 딸은 캐나다로 떠났고 엄마는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그런 정선 씨는 올해 난소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지난해부터 유난히 잦은 복부 통증에 뒤늦게 찾은 병원에서 배에 피가 가득 찼다는 소견을 받았다. 전이가 심한 탓에 지난 9월 대장, 비장, 췌장 모두 떼 내는 대수술을 마치고 이제 막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선 씨를 돌봐줄 이가 없다. 일도 더 이상 못하게 돼 밀린 병원비는 1천만원을 대출을 받아 메꾸고 있는 중이다. 시급한 건 딸에게 가끔 생활비도 보내줘야 하지만 이제 그 길마저 막혀버렸다.


가족을 갖고 싶어 온 한국. 하지만 이제 정선 씨는 다시 혼자가 됐다. 딸에겐 절대로 자신의 투병 소식을 알려선 안 된다는 정선 씨. 딸만큼은 자신처럼 살게 할 수 없다며 그녀는 오늘도 홀로 통증을 견뎌내고 있다.


배주현 기자 pearz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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